[영화] 역사 왜곡한 픽션이 가득한 ‘서울의 봄’
[영화] 역사 왜곡한 픽션이 가득한 ‘서울의 봄’
  • 조희문 영화평론가
  • 승인 2024.01.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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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역사교과서가 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또한 그 자체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필요에 따라 바꾸거나 왜곡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즐겨 다룬다. 이전에 나왔던 수많은 사극영화가 증명한다.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명량’(2014)은 임진란 전투 당시 치열했던 명량해전의 진퇴를 다룬 경우이고 장년 세대들은 전설처럼 기억하고 있는 ‘벤허’(1959, 2016) ‘십계’(1956) 같은 영화들도 사극이다. 

역사를 다룬 영화라 하더라도 좀 더 세분하면 전설이나 신화처럼 이야기의 얼개는 있지만 구체적인 사실의 확인은 어려운 판타지 사극과 구체적인 사실과 기록, 사건을 경험한 생존자나 목격자 등이 남아 있는 팩트 사극으로 나눌 수 있다. 

영화 ‘서울의 봄’(2023)은 지난해 연말에 개봉해 1000만이 넘는 흥행기록을 세우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실제 사건에 관여한 당사자들이 생존해 있고 수많은 기록도 남아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건을 영화로 만든 것은 그 안에 얽혀 있는 극적인 요소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 지켜야 할 마지막 경계는 사실의 흐름을 바꾸지 않는 범위까지다. 사건이나 인물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역사적 사실까지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영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정국은 혼돈에 빠지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 혼돈 속에서 이른바 12·12사태가 벌어진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위급한 상황을 평정하는 아찔한 순간이다. 

‘서울의 봄’은 당시 사건의 긴박했던 순간을 재현하고 있지만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영화다. 앞머리에서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와 상관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보는 동안에는 마치 당시 상황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은 출동하는 2공수부대를 막아서고 끝내 회군시킨다. 

정의로운 군인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없었다. 허구인 이 장면 탓에 전두광 일당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치군인이고 이태신 그룹이 군인의 본분을 지키는 참 군인이라고 우기는 것이 됐다. 

결과적으로 12·12사태는 구국의 결단이 아니라 권력에 눈이 먼 반란 세력의 행위라 매도하고 그 중심에 전두환이란 인물이 있다는 설정이다. 이런 인상은 영화 포스터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2명의 인물을 상하에 배치한 구도지만 전두환 장군을 상징하는 인물은 대머리 진 머리에 야비하게 일그러진 인물이고 또 한명은 반듯하고 당당하게 생긴 모습으로 그려진다. 보기만 해도 어느 쪽이 악의 편에 선 인상이고 선한 편에 서는 쪽은 누구인지 구분된다. 처음부터 선악의 이미지가 대립하는 것이다, 

캐릭터의 모델이 된 장태완은 훗날 전두환 대통령이 제의한 한국증권전산 사장 자리를 받아들였고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했다. 신군부에 맞섰던 올곧은 군인의 행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핵심 캐릭터로 등장하는 전두광 장군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보안사령관, 합동수사본부장의 역할, 대머리 진 분장 등은 누가 봐도 실제 인물 전두환 장군을 떠올리게 한다. 근거도 논리도 없는 선동이고 우격다짐이다. 그렇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인물은 사실과 다르다’는 표현은 왜 달아놓았는가.

실제 사건을 묘사하면서도 혹시 모를 시비나 분란을 피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노린 꼼수는 아닌가. 이런 표현은 픽션을 그리는 영화라면 이해할 수 있다. 캐릭터의 이름이나 사건의 배경이 되는 지역 등이 자세히 나오더라도 단지 우연일 수 있다는 설정은 타당하지만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면서도 사건이나 인물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구실은 왜곡의 의도를 숨기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역사적 논리는 흑백논리로 재단 어려워

픽션은 영웅과 악당의 대결로 꾸밀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흑백논리로 재단하기 어렵다. 이 영화에서는 12.12사태의 책임은 하나회 소속 장군들의 음모와 야심 때문에 벌어졌다고 설정한다. 이는 이완용 내각총리대신 때문에 조선(대한제국)이 망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회를 비밀 결사조직으로 악마화하려는 세력들의 프레임일 뿐 12.12사태의 원인이 아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나 그 밖의 주요 인물들이 하나회 멤버들이기는 하나 위기와 혼돈의 상황에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선 인물들이 우연히 하나회 소속일 뿐이다. 하나회는 친목단체일 뿐이지 사극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듯 역적모의를 획책하는 비밀 반란세력의 조직인 것처럼 설정하는 것은 이들을 12,12사태의 배후로 몰아가려는 세력들의 프레임 씌우기다. 

‘서울의봄’ 구성은 하나회 멤버들을 악인 집단으로 설정하고 이에 맞서는 정의의 군인으로 이태신을 설정하고 있다, 선악의 대립으로 상황을 설명하려는 단순화다. 상황을 입체적으로 살피지 않은 채 단순히 선악으로 평가하려는 것은 의도적인 왜곡을 하기 위해서이거나 사실에 대해 무지할 때만 가능하다. 

‘서울의 봄’은 픽션이라고 하기에는 역사적 사실이 강하고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에는 허구의 이야기가 너무 많다. 결국 다큐멘터리와 허구가 뒤섞인 잡탕인 셈이다. 주인공이 달라지면 시선이 달라지고 시선이 달라지면 사실이 달라진다. 사실이 달라지면 역사도 달라진다. 

객관적인 역사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역사, 원하는 역사를 그려 내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조작이다. 결과는 내가 비난하고 싶은 상대는 악마화시키고 지지하고 싶은 상대는 무고한 희생자나 영웅으로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때의 영화적 상상력이란 말은 악의적인 왜곡을 감추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악의적 역사 날조는 1990년대부터 시작
  
악의적으로 역사를 날조한 영화는 ‘남부군’(1990)이 시작이 아닌가 한다. 지리산으로 도피한 빨치산 게릴라의 시선으로 6·25전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허무하다’느니 ‘민족적 비극’이라느니 따위의 말을 중얼거린다. 눈밭에서 쫓겨다니는 모습에서는 연민을 일으키려 한다. 전쟁의 발발 원인이나 책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고 ‘동족끼리 싸우는 게 안타깝다’는 말을 쏟아 낸다. 북한의 지령을 받거나 추종하는 세력들이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는 주장 아닌가. 

뒤이어 나온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은 전태일의 생애와 상관없이 노동운동에 헌신한 영웅으로 그린다. 전태일의 사망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운동권의 조작이라는 의구심을 받을 정도로 진실 여부가 논란이 있지만 오로지 노동운동에 몸을 바친 공로자로 그린다. 

반대로 ‘그때 그사람들’(2005)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일제시대 향수에 젖은 노회한 정치인 정도로 희화화한다. 민주화, 산업화에 기여한 탁월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깔아뭉개고 대신 교활한 독재자라고 프레임 씌우기를 하려는 것이다. 

‘웰컴투동막골’(2005)은 6·25전쟁의 책임을 미국에 돌린다.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그저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에 국군과 인민군 낙오병들이 들어오면서 소용돌이가 일어나지만 주민과 국군, 인민군이 힘을 합쳐 미군의 침략을 막아낸다는 이야기를 그린다. 전쟁의 발발이 북한군의 침공으로 시작되었고 주민들이 겪는 비극도 그 때문이라는 점에는 입을 다문다. 

‘화려한 휴가’(2007)에서는 5·18 당시 시위 진압에 나선 군부대원을 잔혹한 폭력 집단으로 그린다. 미모의 간호원, 동생을 뒷바라지하며 선량한 가장으로 살아가는 택시 기사, 구김 없이 공부하는 고등학생 등이 계엄군의 횡포에 분연히 맞선다는 설정으로 선악을 대비시킨다. 

더구나 주요 인물들은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도 또박또박한 표준말을 사용한다. 현지에서 통용되는 지역어를 사용하면 캐릭터들이 경박해 보이고, 그들이 겪는 비극적 상황이 공감을 끌어내기 어렵다고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 표준어는 신뢰할 수 있고 광주 지역어는 경박해 보여 기피한다는 것은 지역 차별 아닌가. 

선량한 시민과 흉포한 계엄군이라는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선악의 대립 구도는 이 영화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부분이다. 선동적인 선악의 대립에서 군인들을 잔혹한 가해자로 만들고 5·18 비극의 책임까지 그들에게 전가하려는 속셈이다. 

‘작은 연못’(2010)은 6·25전쟁 당시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일어난 주민 사망 사건을 그리고 있다. 지역 주민들의 소개 과정에서 미군이 주민들을 이유 없이 학살했다는 주장을 한다. 지역 폐쇄 명령이 내려진 지역에서 그곳을 벗어나려는 주민들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영화는 미군의 일방적인 만행처럼 묘사한다. 미군이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고 있다. 

‘택시운전사’(2017) 역시 5·18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선량한 시민·잔혹한 진압군 구도는 그대로 유지된다. 5·18을 미화하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더 강화할 뿐 사건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밝히거나 시민군의 행위에 대해서는 모른 척한다.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택시 운전사 만섭 캐릭터는 100% 허구의 인물이고 그가 펼치는 모든 행위 또한 조작된 연출이지만 영화는 별다른 설명 없이 마치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 

제주 4·3사태를 그린 ‘지슬’(2013)은 주민 입장에서 토벌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방적으로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편다. 남로당이 일으킨 5.10 선거 파괴 공작 때문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상관 않는다. 오직 사건과 관련하여 억울하게 희생당한 주민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다. 

‘남영동 1985’(2012)는 반정부 이념운동을 벌이던 인물이 경찰에 체포당한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의 시각은 악인과 선인의 대결로 몰고 간다. 주인공은 민주화를 위한 순수 운동가이고 경찰은 부당한 국가 권력에 부역하는 하수인으로 매도한다. 운동가가 주장하는 이념의 실체가 국가 전복을 노리는 종북 논리라는 것은 뒤로 숨긴 채 경찰을 비난한다. 

‘1987’(2017)은 이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경찰의 권력 추종과 무자비함을 부각할 뿐 이념화된 대학생 조직의 종북 행동에 대해서는 일절 모른 척한다. 영화는 그저 순수하게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량한 청년이고 경찰은 무고한 시민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나 행동대 쯤으로 매도한다. 국가를 보위하는 공권력이란 인식은 아예 없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낮은 목소리’ 3부작은 위안부 희생자를 자처하거나 수요집회 등 관련 활동을 벌이는 인물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전달한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인 상황은 어떠했고, 위안부가 되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한국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일본의 무자비한 납치·강요를 부각하며 적대감을 더 조장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기 진영에서 내세우는 인물에 대해서는 미담을 과장한다. ‘변호인’(2013)은 노무현의 재야 시절, 돈벌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인물이 시국 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인권변호사로 변신하는 과정을 그린다. 사회는 민주화 운동 열기로 들끓고 있는데도 오로지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현실 문제에는 무심하던 그가 인권 변호사로 새롭게 나는 과정은 북한영화 ‘피바다’의 구성 그대로다. 

북한이 혁명가극의 원조처럼 꼽는 ‘피바다’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혁명에 무심하던 여성이 투사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송우석’이란 캐릭터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노무현의 변호사 시절 담당했던 부림사건의 전개 과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무현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연상시킨다. 

그런데도 ‘실제 인물과 사건을 다뤘지만 허구’라고 영화 시작 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인물과 사건은 실제이지만 이야기는 허구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사실을 빌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주인공은 영웅이고 공안사건을 수사하는 검사는 악마라는 말인가. 

이 밖에도 왜곡과 조작을 담은 영화들을 꼽자면 두 손이 모자랄 정도다. 이런 영화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이후 등장했다. 민주화의 탈을 쓰고 있지만 교묘하게 친북이념을 공공연히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필요에 따라 조작하는 ‘서울의 봄’ 같은 영화는 흥행이 어떻게 되든 가짜영화의 목록에 숫자 하나를 더할 뿐이다. ‘영화적 상상력’은 사실을 왜곡해도 좋다는 면죄부가 아니다. ‘서울의 봄’은 영화의 탈을 쓴 이념 운동의 한 수단이다. 

레닌이 공산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이래 선전수단으로 삼은 영화가 한국에서는 지금도 꽃피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 디지털 시대의 민주화 된 대한민국이지만, 시간은 멈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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