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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와 김사복의 진실

기사승인 2017.09.20  11: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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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독] 중앙정보부와 北 해외공작세력 사이에서 희생됐나

광주 5·18을 다룬 송강호 주연의 영화 <택시운전사>가 지난 9월 13일자로 120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한국 영화사상 이렇게 빠른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는 없었다.

영화는 1980년 5월 21일 광주사태를 전 세계에 보도한 독일 외신기자 피터를 서울에서 광주현장에 인도한 택시기사 만섭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영화는 시작 부분에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라는 전제를 달기는 한다.

그럼에도 광주사태 당시의 특정 상황을, 피터는 힌츠페트 기자를, 만섭은 김사복이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 종반부에는 힌츠페터의 자료 영상이 등장하고, 그의 언급을 통해 김사복이란 존재가 비치기 때문이다. 픽션이라고 전제한 것은 팩트에 관한 논란이 제기될 경우 ‘이는 단지 영화일 뿐’이라는 변명을 위한 방패 같은 장치일 뿐, 영화감독 마음대로 상황을 연출한다.

영화 속에서 실제 주인공인 김사복 씨는 5.18민주화의 숨은 영웅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 김사복 씨가 사실은 우연히 독일 기자 힌츠페터를 태운 것은 아니며 그는 서민이 아니라 당시 호텔에 고급 지입용 승용차를 여러 대 두고 외국인 사업가와 기자들을 상대로 했던 부유한 운송사업자인 것으로 밝혀졌다.(김승필, 팔레스호텔 관계자 등 인터뷰 자료 참고)

더구나 김사복 씨가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실패해 육영수 여사를 숨지게 한 조총련 문세광에게 승용차를 제공했던 인물로 밝혀져 적지 않은 의혹이 불거졌다.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김사복 씨는 서울시 중구 회현동 소재 팔레스호텔에 고급 세단과 리무진을 지입으로 들여놓고 외국인들을 상대로 호텔 택시영업을 하던 사업자였다.

▲ 청계산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힌츠페터, 김사복, 함석헌 옹 등 과 신원미상의 사람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픽션을 가정한 역사의 왜곡, 왜?

1974년 당시, 호텔 택시사업은 노다지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김사복 씨는 파레스호텔에 고급 세단 3대를 들여놓았다. 74년 8월 15일, 문세광은 조선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그날 아침 문세광은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8.15 경축 행사장인 국립극장에 자신이 타고 갈 차량을 요구했으나 마침 조선호텔에는 차량이 없는 상태였다.

호텔 측은 도어맨에게 연락했고, 도어맨이 팔레스호텔에 있는 김사복 씨 쪽에 연락을 취해 차량을 제공했다. 이날 문세광은 검은색 고급 포드 세단차를 타고 국립극장으로 향했다.(월간조선 뉴스룸 기사 참고)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는 김사복 씨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혐의가 없었는지 동아일보 1974년 8월 17일자 기사에는 ‘우연의 일치’라고 보도됐다. 김사복 씨에 대한 조총련 연계 의혹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논의되다가 잠시 주춤했으나 이후 김사복 씨의 아들 김승필 씨가 언론에 제공한 두 장의 사진으로 인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한 장의 사진(사진1)은 김사복 씨가 힌츠페터 기자와 기타 몇몇 사람들과 함께 찍은 것이었는데, 김승필 씨를 인터뷰했던 노컷뉴스 등 언론들은 이 사진에 대해 ‘외신기자와 함께 한 김사복 씨’라고 설명을 달았다.

하지만 이 사진은 편집된 상태였고 원본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외신기자들이 아니라, 당시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 옹을 비롯해 신원을 알 수 없는 이들이 어느 산속에서 회동하며 점심을 먹는 장면이었다.

당시 힌츠페터, 김사복 씨와 함께 있던 인물이 함석헌 옹이라는 사실은 다른 또 한 장의 사진(사진2)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사복 씨, 함석헌 옹의 복장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사진의 현장이 광주가 아니라, 서울 청계산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사복 씨와 독일 공영방송 ARD의 힌츠페터 기자는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사전에 섭외되고 기획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구나 힌츠페터 기자는 입국 당시 기자라는 신분을 감췄다. 그 점도 미스터리다.

이러한 정황은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김사복 씨가 힌츠페터를 우연히 만나 광주로 안내했다는 내용과 전혀 다르다. 더 의아한 것은 힌츠페터 씨가 광주사태 취재 체험을 수기로 펴낸 ‘The Kwangju Uprising; Eyewitness(광주의 봉기: 목격자)’란 책에서 김사복 씨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자신의 취재 동선, 일정이 이 사진들로 인해 모순을 빚고 있다는 사실이다.

힌츠페터 씨는 저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는 광주 현장에 데려가 줬던 김사복 씨에게 무한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표시한다. 그러면서 ‘광주를 나온 이후 단 한번도 김사복을 만날 수 없었고 찾을 수도 없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김사복은 힌츠페터가 우연히 만난 택시기사가 아니라, 사전에 가이드로 섭외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힌츠페터가 자신의 통역 가이드를 겸했던 김사복의 연락처를 모를 수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 김사복씨(우)와 함석헌 옹(좌)

 

자신의 통역, 가이드인 김사복의 연락처를 몰랐던 힌츠페터 기자

실제로 힌츠페터 기자는 86년 서울에서 시위 현장을 취재했다. 문제는 김사복 씨가 84년 암으로 사망했다는 점인데, 힌츠페터는 자신이 섭외했던 김사복 씨가 무슨 일을 하는지, 비상시 연락처는 어디인지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외신기자로서 일반적인 사정이 아니다.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힌츠페터는 처음부터 김사복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었거나, 알았더라 하더라도 힌츠페터가 재입국한 86년에 김사복의 정체는 그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지워졌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김사복 씨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첫 번째 가능성, 즉 힌츠페터 기자가 처음부터 김사복 씨에 대한 신원정보를 알 수 없었다면 이는 김사복과 힌츠페터를 연결한 제3자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사복과 힌츠페터는 오로지 이 제3자만을 통해서 연락이 가능했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리고 있다면 그 3자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위의 사진의 촬영자가 바로 김사복과 힌츠페터를 알고 있으며, 김사복에게 사진을 전달한 주인공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만일 김사복과 힌츠페터가 서로에 대한 정보 공유가 불가능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광주 현장의 취재 역시 기획을 통해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그 기획자는 광주사태 기획자들과 연계된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김사복 씨는 그들과 연계된 것일까.

 

김사복은 中情과 북의 해외공작세력의 회색지대에 있었나

80년 당시 김사복 씨는 이전에 있었던 문세광 차량 제공 이후에도 사업이 잘되어서 10대가 넘는 호텔 택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김사복 씨는 단순한 호텔택시 사업자가 아니라, 모종의 정치세력과 연결된 인물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두 번째 가능성은 힌츠페터 기자가 김사복 씨의 연락처를 통해 김사복 씨를 수소문했지만 김사복 씨의 사망 사실을 알 수 없던 경우다. 이 문제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다. 왜 주변에서 김사복 씨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다든가 하는 정보를 힌츠페터는 입수할 수 없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첫 번째 질문의 대답과 같다. 힌츠페터가 김사복에 대해 알 수 있는 연락처는 제한된 제3자에 의해서만 가능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제3자가 행방불명이었다면 힌츠페터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힌츠페터는 김사복 씨가 팔레스호텔 호텔택시 사업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이야기다.

첫 번째, 두 번째 가능성 모두, 독일 기자 힌츠페터는 김사복에 대해 아주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누군가 김사복을 힌츠페터에게 연결해 주면서 정보를 격리시켰던 것이다. 이 기획자가 누구인지는 현재까지의 자료로써는 한계가 있다.

다만 김사복 씨가 70년대와 80년대 모두 외국인 사업가들과 외신기자들이 애용하는 호텔택시 기사와 사업자였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관리되는 인물이었을 거라는 점은 충분히 가정해 볼 수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외국 기업인들이나 외신기자들과 접촉하는 호텔택시 기사들을 정보원으로 이용했을 것이며 김사복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다.

이러한 추정은 74년 문세광에게 차량을 제공한 김사복 씨가 이후에도 팔레스호텔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심지어 사업을 더 늘릴 수 있었던 점이 뒷받침한다.

권위주의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박정희 정권에서 이런 상황은 대단히 예외적이며 김사복 씨가 중앙정보부의 철저한 수사를 받았으리라는 점에서 팔레스호텔이 계속 김사복 씨와 계약을 유지했다는 점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김사복 씨는 80년 5월 21일 이후 어떻게 지냈을까. 힌츠페터와 함께 광주를 갔다가 나온 후 약 보름만에 힌츠페터의 광주사태 필름은 전세계에 보도됐다.

당연히 전두환 사령부에서 이 내용을 모를 리 없었고 승인받지 않고 잠입취재했던 힌츠페터의 동선을 역추적해서 그를 가이드했던 김사복 씨를 찾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후 이 문제로 고초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다가 84년 암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론도 가능하다.

김사복 씨는 당시 중앙정보부와 북의 해외공작세력 사이에서 회색적인 존재는 아니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김사복 씨에 의해 해외공작세력들의 국내 거점과 인물들이 국내 정보기구에 상당 부분 파악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의 죽음도 어쩌면 이런 맥락 속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힌츠페터는 김사복의 사망 사실 조차도 알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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