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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화친하려던 김홍집을 난자한 조선 군중

기사승인 2017.06.19  10: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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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힘을 발견한 김홍집

한미동맹(韓美同盟)하면 흔히 이승만 대통령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앞서 한미수교의 물꼬를 튼 이는 구한말 김홍집이었다. 김홍집은 주일 청나라 공사 황준센(黃遵憲)을 재촉하여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집필하게 했다.

조선책략은 약소국 조선이 4강의 틈바구니에서 외교적으로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방책을 담은 책이다. 조선책략은 연미(連美), 결일(結日), 친중(親中). 특히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외교의 물꼬는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처음 제시한 책으로 오늘날에도 유효한 내용이다.

조선책략에서 제시한 것처럼 구한말 조선은 그렇게 미국과 연을 맺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일찌감치 세계로 눈을 돌렸던 이가 김홍집이었다. 개화파의 거두이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 고종과 영친왕 생모 순헌황귀비엄씨 / KBS에서 방영한 역사스페셜 '시대의 경계인-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의 한 장면

김홍집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아관파천 직후 친일파의 거두로 몰려 광화문 한복판에서 군중에게 몰매를 맞고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 주한일본공사관의 기록에 남은 김홍집 총리대신의 마지막 모습은 ‘군중들은 총리대신을 난자하는 것도 모자라 시신의 다리에 새끼줄을 비끄러매고 종로 바닥을 쓸고 다니다가 대역부도 죄인을 써 붙인 뒤 다시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짓이기고 돌로 찍어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아관파천 당시의 정황이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종은 경무관에게 명하여 김홍집 등의 목을 베게 했다. 사람들이 달아나라고 권하자 김홍집은 탄식하며 말했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박영효를 본받아 역적이라는 이름을 얻겠는가!”라고 하며 정병하(主:민비 폐비를 주장하고 단발령에 적극적이던 인물)와 함께 체포되었다. 정병하는 “대신(大臣)인 우리를 어찌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는가. 재판을 받은 뒤에 죽게 해주시오”라고 외치자 김홍집은 정병하를 돌아보며 “어찌 말이 많은가. 나는 마땅히 죽겠네”라고 말했다.

김홍집 일행은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순검들에 둘러싸였다. 이때 일본 군인들이 달려와 김홍집에게 일본 수비대로 피신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총리대신 김홍집은 “먼저 전하(殿下)를 뵙고 말씀을 드린 후, 어심(御心)을 돌리지 못하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일본 공사관 측은 김홍집을 가로막고 계속 피신을 권했다.

그러나 김홍집은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조선인에게 죽는 것은 떳떳한 하늘의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일본)들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도 같다”라고 하면서 피신을 거부했다.

김홍집은 자신을 죽이려는 살기(殺氣)를 띤 군중 앞으로 나갔다. 군중 가운데 상당수는 고종의 어용(御用) 용역으로 써먹는 보부상들이었다.

▲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1883년 7월 8일 전관대신 민영익 일행을 도미사절로 미국에 파견했다. 1882년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해외 사절 / 사진출처 : <내가 쓰는 한국현대사> 2011 한상철·이영복 지음

“어명이다. 김홍집을 죽여라.”

조선의 관헌들이 김홍집 총리대신을 경무청의 문 앞으로 끌어냈다. 성난 군중 앞에서 고종의 명을 받은 관헌은 칼을 뽑아 들고 김홍집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김홍집이 쓰러지자마자 경관 수명이 달려들어 일제히 가슴과 등을 쳐서 난도질했다.

그리고 시신의 다리 부분을 거친 새끼줄로 묶고 종로로 끌고 왔다. 시신에 ‘대역무도 김홍집’이라 크게 쓴 장지를 붙였다. 그러자 길에 가득 차 있던 보부상들이 시체를 향해 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발로도 짓이겨 시체에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매천야록에 기록된 김홍집의 마지막 모습이다.

성난 군중 앞에서도 김홍집은 총리대신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갑오개혁으로 조선을 개화시키려던 김홍집의 정치적 야망은 임오군란(1882)과 동학난(1884), 그리고 을미사변(1895)과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파국을 맞았다. 개화파의 거두 김홍집은 그렇게 광화문 한복판에서 친일파라는 멍에를 쓰고 군중들의 뭇매에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조선책략과 한미수호통상조약

김홍집은 1880년 일본이 요구한 인천 개항, 공사주차(公使駐箚)와 해관 세칙(海關稅則) 등의 현안문제를 타결 짓기 위해 제2차 수신사(修信使)로 임명되어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일본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의 대일외교는 실패했다. 일본이 수신사절단에게 일본국왕 알현과 각부대신 예방(禮房)을 종용했다. 서구식 외교상 관례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중국을 종주국으로 여기던 조선의 수신사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2차 수신사 김홍집은 먼저 공자(孔子)묘를 참배하고 청국(淸國)공사관을 예방한 뒤 일본관리들과 만났다. 구한말 개화파의 거두 김홍집이라고 해도 근대적 외교사절로서 외교행위를 몰랐기 때문이다.

일본에 머물면서 그는 주일 청국 공사관 참찬관 황준센(黃遵憲)과 교류를 했다. 6차에 걸친 면담을 통해 김홍집도 세계의 흐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청나라와 일본 외에 미국이라는 강력한 나라가 있다는 것과 일본 역시 구미제국과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것도 새롭게 인지하기 시작했다.

김홍집은  한 달간 일본에 머물면서 국제 정세 탐문 및 국제법과 관련하여 활동을 했다. 특히 조선이 맺은 불평등 조약에 대한 세칙 개정에 몰두했다. 그러나 일본은 김홍집이 전권대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세칙 개정을 거부했다.

김홍집의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머물면서 거둔 성과는 주일 청국 공사관 황준센(黃遵憲)으로 하여금 조선책략을 집필하게 한 것이다. 김홍집은 주일 청국공사 허루장(何如璋), 참사관 황준센(黃遵憲) 등과 조선의 외교정책에 관해 의견을 깊게 교환했다.

그는 귀국하는 길에 황준센이 지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얻어와 고종에게 바쳤다.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 일본, 청국 등 동양 3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서술한 책으로 조선의 개화파는 물론이거니와 유생들에게도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19세기 말 당시 영·미를 필두로 한 세계는 러시아의 팽창이 최대 이슈였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1860년 베이징조약을 통해 러시아에게도 극동 연해주지역을 할양해야 했다. 극동까지 진출한 러시아에 일본 역시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세계의 흐름 속에 조선이 살아남을 위한 책략은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하여 개국(開國), 균세(均稅), 자강(自强)책을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이 조선책략의 핵심골자였다.

특히 조선책략의 내용이 친중, 결일보다 연미론(聯美論)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도 이유가 있다. 김홍집이 교류한 청국 공사관 허루장(何如璋)은 이렇게 주문했다. “조선도 속히 공사(公使)를 일본에 상주시켜 세계 정세를 세밀히 파악해야 합니다. 러시아를 막아내려면 서구 열강 중에 신의가 높은 부강한 미국과 먼저 통상조약을 맺은 뒤 다른 나라와 교섭해야 합니다. 미국은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남의 토지와 인민을 탐내지 않으며, 굳이 남의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 나라이자 천하에 으뜸가는 부국입니다.”

조선책략 내용이 고종에게 보고된 지 2년 후인 1882년, 조선은 청국(淸國) 북양대신 이홍장의 주선으로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조.미 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은 조선 측 전권대신(全權大臣) 신헌(申櫶)과 미국 측 전권공사 슈펠트(Robert W. Shufeldt) 간에 전문 14관(款)으로 이뤄졌다.

전문 14개조로 구성된 조약의 주요 내용은 ▶제1조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 ▶제2조 양 체결국은 각각 외교대표를 상호 교환하여 양국의 수도에 주재 시킨다 ▶제5조 치외법권은 잠정적으로 한다 ▶제4조 수출입상품에 대한 관세부과권은 조선정부에 속한다 ▶제6조 거류지는 조선영토의 불가결한 부분이다 ▶제11조 양국 간에 언어, 문예, 법률 등 문화학술교류에 보호와 원조를 다한다 등이다.

고종은 청·일의 외압으로부터 독립을 보존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친미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고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후 이듬해 공사(公使) 푸트(Foote, L. H.)가 내한하자 이에 대한 답례와 양국 간 친선을 위하여 1883년 7월 보빙사(報聘使)라는 명칭으로 대미(對美)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대신 홍영식(洪英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수원 유길준(兪吉濬)·고영철(高永喆)·변수(邊燧)·현흥택(玄興澤)·최경석(崔景錫) 등과 중국인 오례당(吳禮堂), 일본인 미야오카(宮岡恒次), 미국인 로웰(Lowell, P.) 등 모두 11인이었다.

귀국 후 민영익은 고종에게 “미국은 땅이 넓고 곡식이 많이 생산되며, 사람들이 모두 무실(務實)한 고로 상무(商務)가 매우 왕성하여 비할 나라가 없나이다”라고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민영익은 뉴욕이 가장 보기 좋았다고 고종에게 아뢰었다.
   
사드 철회는 문재인 정부의 쇄국정책 신호탄일까?

한강의 기적은 1880년 <조선책략>이 말한 바 그대로 미국과 동맹을 맺은 결과다. 미국과의 동맹, 즉 연미론(聯美論)을 기본으로 하여 결일(한일수교)한 대한민국은 중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유길준, 서재필, 김홍집 등 구한말 개화파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개화(開化)는 달리 말하면 중국이라는 대륙세력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했다. 미국이라는 선진해양세력과 손잡은 대한민국은 개화파들이 원하던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화 대신 또 다른 쇄국정책이 펼쳐지는 듯하다.

대한민국을 방어하는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를 두고 문재인 정부는 문제를 제기했다. 3년간 이어진 배치 과정을 두고 졸속이라고 폄훼하면서 급기야 1개 포대에 6개 발사대 배치를 투명성에 문제가 있다고 논란을 야기했다.

결국 지난 5월 31일 한국을 방문한 덕 더빈 미 상원의원은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우리는 어려운 예산 상황에 직면해 많은 프로그램을 삭감하고 있는데 한국이 사드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9억 2300만 달러(약 1조 300억 원·사드 배치 및 운용 비용)를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전했다.

덕 더빈 상원의원은 상원 세출위원회 국방소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다. 그의 의견은 그대로 미 국방예산에 반영될 수 있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끝내 사드 배치를 무산시킨다면 한미관계는 회복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미국과 연이 끊어진다면 그것은 21세기 판 쇄국정책의 신호탄이 된다.

김홍집이 몰매 맞아 죽은 광화문 vs 촛불집회의 광화문 광장

반면에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해찬 의원을 중국에 특사로 보냈다. 이해찬 특사를 맞이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모습이 문제가 되었다. 이해찬 특사는 시진핑 주석에게 90도 각도로 절 하듯이 인사했다. 시진핑 주석은 뻣뻣하게 그를 맞이했다.

회담 장면도 마치 조공사절단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의 속내는 아마도 ‘이제 한국은 과거 속국처럼 중국의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인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한 말 이 땅의 선각자들은 끊임없이 개화를 갈망해왔다. 최초로 미국에 유학하고 <서유견문>을 남긴 유길준은 개화를 등급별로 구분했다. 개화와 반개화 그리고 미개화로 분류했다. 특히 미개화를 정의한 부분이 흥미롭다.

미개화란 ‘천만가지 사물에 알맞은 규모와 제도가 없을 뿐더러 애당초부터 경영에도 관심이 없으며, 능한 자가 어떠한지 능치 못한 자가 어떠한지 분별조차 못할 정도로 일정한 법도가 없는 야만’이라고 정의했다.

대한민국은 정말 개화했는지 요즘 들어서 의문이 더더욱 쌓여만 간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정상급의 국가가 되었지만 국민 개개인의 심성과 태도는 과연 개화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한미 FTA 협상 과정과 광우병 파동 때 서울 한복판은 촛불로 넘실거렸다. 지금도 경북 성주는 주한미군 사드 반대를 외치는 군중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갑오개혁 후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을 때려죽인 군중의 모습과 오늘날 광화문광장의 촛불이 오버랩 되는 것은 아직도 우리는 미개화된 상태라는 것을 증명한다. 언제쯤 우리는 완전한 개화(開化)를 이룰 수 있을까?

고성혁 군사전문저널리스트 webmaster@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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