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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김창수> 그리고 무서운 영화의 시대

기사승인 2017.11.13  17: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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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김창수>는 관객을 괴롭히는 영화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뭐뭐가 있다. 필자가 종종 쓰는 표현인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세상 모든 남자는 딱 두 종류다. 바보 자식과 나쁜 놈.” 여성의 입장에서는 바보와 나쁜 놈 중 차악을 고르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식의 이분법은 다소 거칠지만 어쨌거나 명료하고 가끔 재미로 즐기기에도 좋다.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나에게 세상의 영화는 딱 둘이다.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 잘 만든 영화는 재미있는 영화다. 못 만든 영화는 재미없는 영화다(너무 당연한 얘기라고? 원래 진리는 단순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영화를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로 구분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예술 영화라고 기필코 재미가 없지는 않다. 요는 잘 만들었는가의 문제이지 형식이나 내용은 별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다.

▲ 영화 <대장 김창수>의 한 장면

못 만든 영화는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영화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다(여기서 사람은 감독을 말한다). 영상에 대한 감각은 땅바닥인데 욕심은 하늘에 닿아 있어 저도 이해 못하는 소리를 두 시간 내내 지껄인다. 관객은 이미 이해를 다 끝내고 다음 사건을 기다리는데 설명한 것을 또 하고 또 하고 아주 끝장을 보려 든다.

한마디로 지루의 절정으로 관객들은 그저 영화가 끝나기만 기다리게 된다. 다른 하나는 무서운 영화다. 수시로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너의 췌장을 파먹고 싶다, 따위의 소재를 담아서 무서운 게 아니다. 예술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예술이고 감동을 강요하는 예술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그 전형이다. 그래서 무섭다. 다음 장면에서는 또 어떤 교사(敎師)적인 시선으로 관객을 괴롭힐지 몰라 무섭고, 보는 사람은 전혀 ‘필’이 안 오는데 쉬지 않고 감동을 윽박질러서 무섭다.

스크린 속 배우들은 담담한데 관객이 울어야 그때부터 감동이다. 그런데 안 그런 영화들이 최근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관객은 하품하는데 스크린 속 배우들은 계속 질질 짠다. 이래도 안 울어? 하면서 졸라대고 이때 감성적인 음악까지 가세해서 어떻게든 관객의 감정 선을 건드리려고 할 때는 정말 고통스럽다.

당연히 최악의 영화는 바로 이 둘이 동거하는 영화다. 지루한데다 교훈과 감동까지 목표로 삼고 있어 관객을 정서적으로 고문 끝에 목 졸라 죽인다. 대체 어떤 영화가 그런 영화인가요, 물으신다면 마침 딱인 영화가 있다. 얼마 전 개봉한 <대장 김창수>다.

백범일지를 읽지 말라고?

“백범일지를 읽지 마시오.” 감독이 백범 역의 조진웅을 캐스팅하면서 한 주문이란다. 무슨 의도인 줄은 알겠다. 자기가 연기할 인물에 대해 선입견이 들어가는 게 연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존 인물에 갇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김창수로 연기를 해달라고 얘기했어요. 실제 백범일지를 읽으면 힘들어서 연기를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 글을 이만큼까지 쓰는 과정의 것은 나 혼자 감당했으니 너는 하지 마라는 게 제 생각이었죠. 배우는 창작하고 예술을 하는 사람인데 아우라에 갇힐까 걱정도 됐고요. 영화 작업이 다 끝나고 읽고 싶으면 읽으라고 했어요.”

말을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백범일지를 읽되 빠지지 말라고 하거나 영화 작업이 다 끝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읽으라고 했어야 옳고 맞다. 혹시 조진웅이 감독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여 백범일지를 아직도 안 읽었다면 이것은 조진웅이라는 한 개인에게 엄청난 손해다.

백범일지는 너무나 재미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체험을 말씀드린다면 나는 백범일지를 읽다가 몇 번이나 배를 잡고 뒤로 넘어갔다. 웃고 또 웃고 나중에는 눈물까지 찔끔했다.

일단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너무 좋다. 캐릭터가 좋다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데 최고의 조건이다(참고로 일류 시나리오 작가들은 캐릭터부터 만든다. 삼류들은 스토리부터 짠다. 그래서 삼류다. 캐릭터가 좋으면 스토리는 저절로 나온다). 백범일지, 다들 읽으셨겠지만 오래 되어 가물가물할 수 있겠다. 해서 기억도 되살릴 겸 앞부분만 조금 정리를 해보자면 이렇다.

여섯살 꼬마의 ‘복수’ 소동

백범은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으로 방조(傍祖 : 육대 조(六代祖) 이상인 직계가 아닌 방계의 조상) 김자점이 반역죄를 저질러 멸문지화의 위기에 놓인다. 일가는 황해도로 도망가 상놈으로 신분세탁을 하는데 백범이 나기 200년 전의 일이다.
백범도 맨손으로 일인을 때려죽였지만 실은 이게 다 가문의 내력이다.

사람을 구타하면 맞은 자를 때린 자의 집에 떠메어다 눕혀놓고 생사 여부를 기다리는 것이 당시 그 지방의 풍습이었다. 백범의 집에는 한 달에도 여러 번 ‘거의 죽게 된 사람’ 혹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사랑방을 차지하고 누워 있었는데 전부 아버지인 김영순의 업적이다.

술만 취하면 동네 양반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겼다. 삼촌인 김준영은 한 술 더 떴다. 얼마나 사람을 패고 다녔는지 가족회의 끝에 앉은뱅이로 만들기로 결의하고 발뒤꿈치를 잘랐다. 다행히 힘줄이 상하지는 않아 병신은 면했는데 범같이 울부짖는 통에 사람들이 무서워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백범도 만만치 않다. 동네 아이들이 자신을 구타하자 집으로 돌아와 부엌칼을 가지고 다 찔러 죽일 요량으로 그 집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알아챌까봐 뒷문으로 들어가는 치밀함을 보였는데 그 집 식구에게 들켜 실컷 얻어맞고 칼까지 뺏기고 돌아온다. 이게 백범이 여섯 살 때 일이다.

복수를 하려고 칼을 들고 까치발로 남의 집 뒷문으로 침투하는 여섯 살 아동의 심각한 표정을 떠올려 보라. 킥킥 웃음이 안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이 피카레스크(악당 소설) 풍의 에피소드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청년 김구가 일본인을 때려죽이는 장면부터 시작되는데 솔직히 말해 심히 부담스럽다. 자연스럽게 긴장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심각한 이야기를 할 것이니 관객 여러분은 알아서 긴장하시라는 예고편처럼 느껴진다. 유년 시절을 조금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거기에 집안 내력도 가볍게 처리해 살짝 집어넣었더라면 관객들은 한바탕 웃은 뒤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없으면 지어서라도 넣을 만한 아까운 에피소드와 캐릭터를 건너 뛴 감독의 의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백범일지’를 좀 더 보자.

백범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이 열두 살 때다. 당시에는 선생의 급을 ‘벼 열섬짜리’, ‘다섯 섬짜리’ 하는 식으로 나눴는데 백범의 첫 스승은 학력이 변변치 않았는지 양반 스승은 못하고 상놈 스승을 하는 중늙은이였다. 선생은 종종 해고당하기도 했는데 이유에는 ‘밥을 많이 먹어서’ 따위도 있었다. 백범은 공부를 잘 했던 모양이다. 특히 암기력이 좋았고 서당에서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공부라는 게 결국 과거가 목표인데 첫 시험을 치른 백범은 그 자리에서 과거 제도가 얼마나 썩어문드러져 있는지를 보고 의욕을 접는다. 출제자와 특정 수험자가 같은 편인 이상한 과거였다. 이후 백범은 과거가 아닌 실용 학문으로 방향을 틀어 제문이나 축문, 혼례 문 따위를 쓰는 법을 익힌다.

어쨌거나 돈이 되니까. 업종 다각화의 차원에서 백범이 또 도전한 것이 풍수와 관상이다. 두문불출하고 관상을 공부하던 백범은 자신의 얼굴부터 뜯어보게 되는데 귀격(貴格)이나 부격(富格)은 아예 없고 얼굴과 온 몸에 죄 천격(賤格), 빈격(貧格), 흉격(凶格) 뿐인 것에 충격을 받고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그러다가 생각을 고쳐먹는다. 타고난 얼굴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고 상 좋은 사람(好相人)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던 중 만난 게 동학이다. 백범은 그 쪽으로는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학에서는 자신에게 도를 전한 사람을 연원이라고 하고 자기에게 도를 받은 사람은 연비라고 한다.

백범은 불과 수개월 만에 수천 명에 달하는 연비를 거느리게 된다(요즘으로 치면 트윗 팔로워?). 그렇게 얻은 별명이 ‘아기 접주’였고 이후 백범과 그의 연비들은 동학군의 주력부대가 된다. 그리고 그 일로 만난 것이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다. 안태훈은 수려한 면모를 가진 사내였지만 다만 음주가 과다하여 코끝이 빨간 게 흠이었다.

백범보다 네 살 아래였던 중근은 학문보다 사냥을 즐기는 스타일이었고 공부는 적성에 안 맞아 안 하는 걸로 아버지와 이미 타협을 본 상태였다. 안태훈의 사랑에 종종 들리던 고능선이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나중에 백범의 스승이 된다. 멘토인 안태훈이 서학에 우호적이었다면 고능선은 척왜척양(斥倭斥洋)의 화신이었다. 고능선의 사상은 한동안 백범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주요한 사고방식이 된다.

여기까지가 백범의 스무 살 때까지의 행적이다. 앞부분만 훑었지만 충분히 흥미진진한 것은 물론이요 백범의 유ㆍ청년 시절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사건과 만남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전지식 없이 백범을 연기하는 것이 과연 유익하고 바람직한 것이었을까.

실존 인물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왜곡

감독은 배우가 실존 인물에 갇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인터뷰를 다시 보자.

“실존 인물에 갇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김창수로 연기를 해달라고 얘기했어요. 실제 백범일지를 읽으면 힘들어서 연기를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 글을 이만큼까지 쓰는 과정의 것은 나 혼자 감당했으니 너는 하지 마라는 게 제 생각이었죠. 배우는 창작하고 예술을 하는 사람인데 아우라에 갇힐까 걱정도 됐고요. 영화 작업이 다 끝나고 읽고 싶으면 읽으라고 했어요.”

인터뷰를 읽다보면 배우에게 갇히지 말라 주문하면서 정작 무엇인가에 갇힌 것은 오히려 감독 자신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너는 하지 마라’는 표현이 특히 그렇다. 마치 자기가 해석한 김구와 ‘백범일지’가 있으니 배우는 그 해석에 기초해서 쓴 시나리오에 따라 단선적인 감정 표현만 하면 된다는 뉘앙스로 들린다.

실제로 대부분의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배우가 자신의 해석과 색깔로 배역을 연기하는 거다. 해서 아예 그런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럼 대체 감독은 뭘 보여주고 전달하려고 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영화에 대한 가장 악랄한 비평은 이거다. ‘뭘 말하려는지 잘 모르겠는 거 빼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 이것은 절대로 괜찮다는 표현이 아니다. ‘대장 김창수’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잘 만든 영화의 공식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의 변화다. 영화가 처음 시작했을 때의 주인공과 끝날 때의 주인공은 사람만 같지 전혀 다른 인물이 된다. 그리고 그 변신이 합리적이고 관객의 동의를 얻을 때 감동이 스파크를 일으킨다. 가령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변호사가 이타적이고 진지한 캐릭터로 바뀐다든지 남 앞에 나서지 못하던 대인기피증 환자가 대중 강연자로 성공한다든가 하는 식이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뒷골목 채권추심업자가 처절하게 온 몸을 불태우는 복서가 되거나(<록키>) 불법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던 사람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되거나(<메트릭스>) 하는 따위다. ‘대장 김창수’는 인물의 변화가 별로 없다. 아니 있어도 너무 미약하여 관객이 그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다. 짐작하기에 감옥 생활을 통해 김구라는 인물이 뭔가 변화를 일으키는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한데 그 진폭이 너무 좁다.

그것은 영화의 앞부분에서 김구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꼭 정답은 아니겠지만 유년기를 살짝 넣어 인물의 연대기를 조금만 늘렸어도 관객들은 앞뒤 물불 안가리던 열혈 청년이 세상은 함께 사는 것이고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만이 바꿀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공감과 재미를 몇 배로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과감하게 재미를 포기했다.

감독은 자신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중간 중간마다 주인공은 그 메시지를 관객에게 강제로 전달하려고 일장 연설을 하거나 대사 톤이 비장미 일색이다.

그러나 보는 사람에게는 이런 고역이 없다. 관객을 가르치고 감동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는 100% 실패다. 일찍이 링컨이 말했다. 사람들은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만 가르침을 받는 것은 싫어한다고. ‘대장 김창수’는 그 잘못된 궤도를 아주 정확히 따라갔다.

백범일지를 읽어보기는 한 건지

합리적인 의심은 또 다른 합리적인 의심으로 이어진다. 감독의 의도가 자신만의 김구를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아니라 철저히 상업적인 계산에 의해 연출된 것이 아닐까 하는 부가 의문.  대한민국 정치인의 절반 이상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게 백범이다.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역사 인물 순위에서도 항상 상위에 랭크되는 게 백범이다. 그런 백범의 이야기를 ‘소통’과 ‘함께’에 담아 버무리면 관객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식의 내러티브를 구사했다면 그것은 한국 영화의 아주 위험한 탈선이자 퇴보다. 이름을 붙이자면 대중 추수주의 영화고 포퓰리즘 영화다.

한 발 더 나가 혹시라도 정권과 코드가 맞는 소재나 주제일 경우 흥행에서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면 정말 위험한 발상이다. 그것은 결국 질이 낮은 영화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사견임을 전제로 말씀 드리자면) ‘백범일지’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이 이 일본인 살해 사건이다.

그리고 감옥 생활도 별로 안 재미있다. 유일하게 웃은 부분이 백범이 탈출하는 부분인데 앞 사람 넷을 먼저 보낸 뒤 혼자 남아 버둥대다가 장대 높이 기술을 이용하여 담을 넘는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을 김구라는 인물 해석의 중심에 놓았을까. 혹시나 반일 정서 뭐 이런 걸 염두에 두었다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반미(反美)하면 4·3이고 반일하면 민비 시해다. 이에 격분하여 근거 불충분한 일본인을 참살하고 재판정에서 일본인 재판관들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기개를 떨치는 인물이라면 충분히 대중적인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참으로 영화적이지 않은 발상이다. 게다가 영화에 나쁜 조선인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나쁜 ‘놈’이었다가 나중에는 좋은 ‘사람’이 된다. 관객이 납득도 하기 전 순식간에 착한 조선인이 되는 캐릭터도 있고(정만식이 연기한 마상구) 마지막에 가서 회개하는 인물도 있다(유승목이 연기한 이영달).

심지어 끝까지 절대 자기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친일파 고위 관리도 마음 깊은 곳에는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있다(송승헌이 연기한 강형식). 결국 조선 민족은 하나다, 라는 얘기다. 재미를 포기하고라도 달성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겨우 반일과 조선은 하나다, 로 추정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니다.

별로 놀라울 것도 없다. 반일이 영화 흥행의 한 코드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오래다. <암살>이니 <밀정>이니 최근의 <군함도>까지 재미를 톡톡히 봤다. 그 정서를 노리고 영화를 만드는 건 자유지만 그런 영화들이 관객 천만을 동원하는 것은 여전히 조선 망국 시즌에 머물러 있는 국민 정서를 드러내는 것 말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상처는 모래에 쓰고 은혜는 돌에 쓰라고 했다. 해방된 지 70년이다. 우리는 반대로만 간다.

한편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역사 왜곡이다. 백범이 가장 질색하고 싫어했던 것은 일제가 아니라 전체주의였다.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였고 이씨 조선을 지탱했던 주자학의 독재였고 소련식 민주주의라고 불리던 공산당 독재였다. 김구 = 반일의 공식에 그를 가두는 건 후세인들의 정치적인 이기심일 뿐이다.
        
대장 김창수, 남한산성으로 가다

<대장 김창수>가 걸어간 길, 처음이 아니다. 흥행에 실패한 <남한산성> 역시 비슷한 경로를 갔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을 빗대서 영화를 읽을 수 있도록 내러티브를 짜다보니 스토리가 아니라 배우들이 연기 대결을 벌이는 ‘연설 사극’으로 전락했다. 아마 관객들이 그런 걸 좋아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기본적으로 재미를 추구하지 절대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의미를 추구한다면 그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러 가는 진영(陣營)논리 환자일 뿐이다. 말난 김에 <남한산성> 험담 하나만 더 하자.

대체 영화 속에서 챕터를 구분하는 못된 습관은 어디서 배운 것일까. 영화 속 챕터 구분은 타란티노 감독 한 사람이면 충분한 영화적 이벤트였다. ‘남한산성’의 감독은 아예 연출을 포기한 듯 보인다. 영화로 재탄생시킨 게 아니라 다만 김훈의 소설을 영상으로 옮겼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최악의 방식으로. 참고로 김훈의 소설에는 전체를 통틀어 ‘그러나’가 딱 한 번 나온다.

그러나, 그리고, 그래서는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이 문장을 잇기 위해  구사하는 기법이다(이 글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김훈의 소설을 분절 처리하여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손해 배상감이다. 앞으로도 이런 유의 영화, 이런 유의 역사물은 계속해서 나올 공산이 크다. 그것은 재앙이다.

대중들이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것을 보고 싶어할지 미리 짐작하고 거기에 맞춰 영화를 만든다면 K-Movie에 앞날 같은 건 없다. 영화는 영화다워야 한다. 재미는 없고 목소리만 크고 기획의도만 잔뜩 들어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webmaster@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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