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개국 1000명이 즐긴 8일간의 유토피아
62개국 1000명이 즐긴 8일간의 유토피아
  •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과 교수
  • 승인 2017.09.06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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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한국에서 열린 102차 국제어 에스페란토 세계대회

현실의 불확실성과 불안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62개국에서 모인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로 8일간을 함께 웃고, 관광의 지속 가능성을 주제로 때론 심각하게 토론하고 더러는 한반도 분단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한국의 전통문화에 매료되고 K-pop에 맞춰 흥겨워했다면 이것은 분명 예삿일은 아니다.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보통사람 1000명 이상이 7월 22일부터 29일까지 한국외국어대에서 열린 102차 에스페란토 세계대회(102a Universala Kongreso de Esperanto)에서 통역 없이 서로 소통하며 1년 만에 만난 즐거움을 만끽했다.

100년이 넘는 세계대회의 노하우와 한국인의 정과 열정이 더해져 대회는 본 대회 후에도 1주일, 2주일 이상 관광으로 계속 이어졌다. 대회에서 사귄 우정은 한국 친구들이 사는 전주, 부산, 진주, 대구, 경주, 동해안, 제주까지 계속되며 290명이 올리는 후담과 사진으로 카카오톡 단톡방이 새벽까지 계속 까톡거렸다.

▲ 제102차 국제어 에스페란토 세계대회 개막식 장면

통역 없는 국제 회의

총 193건의 모임, 회의, 학습, 강연, 체험 중에서 딱 한건 통역기가 동원되었다.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25개국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의 남북통일을 주제로 한 비정상회담 때였다.

2016년 101차 슬로바키아 니트라 세계대회 때 도라산역을 출발하여 베를린 장벽까지 1개월간 이어진 남북통일 기원 시베리아 횡단열차팀 1진에 이어 금년에는 거꾸로 베를린에서 도라산역까지 한 달 동안 달려온 횡단열차팀 2진이 꾸려졌고, 마지막 행사로 세계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남북한 문제와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국내 방청객과 정확한 소통을 위해 통역이 필요했다.

국어의 중요성과 국제어의 필요성

1887년 폴란드 안과의사 자멘호프(Lazaro Ludoviko Zamenhof) 박사가 발표한 국제어 에스페란토(Esperanto) 사용자들은 1905년 이후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4년과 2차 세계대전 전후 7년을 제외하고 매년 나라를 바꿔가며 세계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1주일 넘게 학술대회, 단체 홍보와 회원간 친목 도모, 세계협회 임원들과의 토론, 전공 전문가들의 강연, 연극, 콘서트, 합창, 친선 축구 경기, 한글 배우기, 부채 만들기와 택견 등 한국의 다양한 문화, 교육 프로그램을 하루 10시간 이상 진행했다.

어학 단체답게 특히 한글 배우기에 푹 빠져 있었다. 어려운 자음 발음과 다양한 모음을 익히느라 강의자의 입모양을 열심히 따라했다. 현장을 보며 세계 인구 75억 2566만 가운데 남북한 7662만 명, 즉 세계 인구의 1%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한글에 대한 자긍심이 느껴졌고,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한국인)은 조선어(한국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일본인 에스페란토 사용자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은 철저히 1민족 2언어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자국에서는 자국어를 사용하고, 두 개 이상의 민족이 모였을 때는 중립적인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며, 다른 민족의 언어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차 있다.

1994년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열린 102차 에스페란토 세계대회는 아시아에서 일본(2회), 중국(2회), 베트남(1회)에 이어 여섯 번째로 열린 대회로 한국의 위상이 한 단계 수직 상승하는 국제회의였다.

평균 5년 간격으로 유럽 밖에서 개최되는 대회를 유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한 대회여서 2014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워 3년 만에 두 번째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대회 앞뒤로 50차 교직자대회, 90차 무민족성협회 대회, 원불교의 국제선방, 민간교류의 자연체험 동호인의 사랑방 등이 열렸다.

▲ 콩크레스에 참석한 각국 대표단들

아시아의 부상과 한국의 위상

20세기 후반부터 아시아 각국의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세계인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과 한·중·일,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위상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한국 에스페란토 사용자 중에서도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UEA: Universala Esperanto-Asocio) 회장직을 역임했던 고(故) 이종영 교수, 그리고 세계협회 임원을 역임한 서길수 박사, 이중기 선생 등이 계속 배출되고 있고, 아시아 위원회(KAEM: Komisiono pri Azia Esperanto-Movado)에서는 이미 여러 명이 회장을 역임해 한국인의 위상이 높아져 있다. 2016년에는 아시아 위원회의 역할이 호주와 뉴질랜드의 오세아니아까지 함께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금년 서울 대회에서 아시아 위원회는 아시아 신흥공업국 12개국의 참가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모금한 후원금으로 아시아 신흥국의 에스페란토 사용자 가운데 열정이 넘치고 언어 실력이 특출한 청년을 대상으로 응모와 심사를 통해 선발했다.

1994년 세계대회 때 처음 실시한 초청 프로젝트를 계승하고, 한국에서 열린 세계대회를 기념하기 위한 이벤트였다. 그리고 에스페란토 세계대회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의 밤을 개최해 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세계인이 체험하도록 하고, 아시아인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자리를 마련했다.

2016년 슬로바키아 니트라 대회에 참석한 아시아인의 비율이 14%에서 2017년 서울 대회에서는 56.4%로 커졌다. 앞으로 세계협회의 정책에서 아시아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해야 할 것인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대회를 마치면서 촬영한 폐회사진


영어 시대와 에스페란토

많은 사람이 영어의 힘과 위력에 공감한다. 특히 비즈니스와 관광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주로 영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 대륙과 남미, 아프리카를 여행해보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프랑스어의 위력도 만만치 않음을 실감한다. 필자는 47년간 70개국을 여행하며 80% 이상 민박을 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에스페란토에는 파스포르타 세르보(Pasporta Servo)라는 민박 네트워크가 있으며, 90개국에 1300명 정도가 가입되어 있고, 필자도 회원이다. 인터넷이 없을 때는 3개월 전에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이제는 1주일 전에만 이메일을 보내거나 그 도시에서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최근에는 친구찾기(Amikumu)라는 앱을 통하면 내 주변 몇 킬로 범주에 회원이 있는지 알 수 있고, 소통해 곧바로 만날 수도 있다.

뉴욕, 런던, 파리, 베를린, 도쿄 등의 대도시에서 무료 숙박을 모두 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뉴욕 모마(MOMA) 바로 다음 블록에 사는 방송국 피디, 네덜란드에서 이주해 40년간 민박을 하며 1박에 상징적으로 1파운드만 받는 런던 할머니(돈을 안받으면 불필요한 선물을 계속 줘서 생긴 제도), 주말이면 벨기에 부인 집에 가느라 늘 집을 통째로 사용하도록 해주는 파리지엥, 세계인이 항상 그득한 베를린의 분위기 좋은 언어학자의 집, 1983년 이후 변함없이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도쿄의 일본인 누님, 그리고 동구라파의 그 많은 친구들을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아프리카 25일 여행, 북구라파 3주 여행, 캐나다 1개월 여행에 대한 경험은 책으로 써도 부족할 정도이다.

말이 통하니 무엇이든지 물을 수 있고, 이해가 되니 즐겁고, 즐거우니 웃음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각국의 언어들이 국력에 의존해 힘을 사용할 때, 희망을 상징하는 별과 평화를 상징하는 녹색으로 구성된 녹색별을 사랑하는 국제어 에스페란토 사용자들은 언어를 통한 세계 평화를 목표로 행동하는 세계인의 비정부기구(NGO)로서, 유네스코와 영사관계를 맺고 세계 평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 평화주의자들은 매년 7월 마지막 주에 세계를 돌며 우정을 나누고 세계를 뜨겁게 포옹하며 산다. 이들이 무더운 여름날 한국에서 나눈 포옹이 가슴 속에 오래 남아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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