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투쟁의 수단으로 바뀐 한국의 역사
이념투쟁의 수단으로 바뀐 한국의 역사
  •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 승인 2017.07.1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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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시와 도종환 문체부 장관의 유사역사학이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E. H. 카)라거나, ‘과거를 기억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조지 산타야나)라는 등, 근엄하고 위선적인 경구들이 많이 있지만, 한국에서 역사란 진영 투쟁의 무기에 불과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앎-권력의 철학자 푸코는 이미 역사란 객관적인 과학이 아니라 한 계급, 혹은 한 세력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도구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전쟁 또는 여러 세력 간의 싸움을 분석하고 판독하는 틀이 아니라 현재의 힘의 관계를 수정하는 틀이라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 담론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은 현재 자기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고, 역사의 진실을 독점하는 것은 현실 파워 게임에서 결정적으로 전략적인 고지를 점유하는 지름길이다. 국가의 정통성을 밑바닥에부터 갉아 허물어뜨리는 엄청난 힘을 가진 것도 역사다.

현재 우리 사회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386세대가 1980년대 초 골방에서 읽고 탐독했던 반(反) 자본주의적이고 친 북한체제적 이념들이 지금은 어엿하게 교과서 속으로 들어와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교육되고 있다. 한 마디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 민중사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이다.

문제는 식민지 한국 사회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일제시대의 한국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半封建)사회’로 보면 좌파이고, 이 시기를 ‘식민지 근대화’ 시기로 보면 우파이다. 그 용어의 근원부터 살펴보자.

 

좌파는 식민지 반봉건, 우파는 식민지 근대화로 보는 일제시대

 ‘식민지 수탈론’과 동의어라 할 수 있는 ‘식민지 반봉건(半封建)사회론’은 말뜻으로만 풀어보면, 식민지 사회가 아직 전근대적인, 절반 정도만 근대화된, 반(半) 봉건적 지주(地主)제 사회라는 것이다. 지주제를 철폐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등의 근대적 토지개혁을 거치면 장차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라는 의미이다. 안병직 교수가 아직 우파로 전향하기 전 80년대 초에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강의했던 ‘식민지 반(半) 봉건 사회론’을 시작으로, 1980년대 학생 운동권과 노동 운동권에서 크게 맹위를 떨쳤던 개념이다.

이것은 원래 중국 공산당이 중국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정통 마르크스주의 역사 이행론을 살짝 수정해 만든 이론이다. 서구 열강의 침략 이전 중국은 농업을 주로 하는 전통적 봉건사회였으나, 제국주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게 되면서 지배국가의 자본주의 제도가 부분적으로 이식되었다. 전통적 봉건사회는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채 부분적으로 유지되었고, 따라서 정상적인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봉건주의와 자본주의 제도를 교묘히 반반씩 유지함으로써 결국 중국을 지속적으로 후진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려는 제국주의의 교활한 전략이었다고 중국 공산당은 주장했다. (김철홍, <마르크스의 유령들>)

한국에서 이 이론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탄생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조선 시대가 정체된 사회여서 자체적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동력이 없었다는 것, 따라서 조선이 근대사회로 바뀌는 과정은, 비록 불행한 일이기는 했지만, 외부 세력의 타율적 견인이 불가피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관이다. 어찌 보면 일본의 식민지 경영을 합리화하는 것이어서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실제로 일본인 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서, 좌파들은 이를 ‘식민사관’으로 매도한다.

이에 대항하여 식민지 수탈론은 ‘내재적 발전론’ 또는 자본주의 ‘맹아(萌芽)론’을 근거로 제시한다. 조선 후기 사회가 정체되어 있기는 커녕 내부적으로 자생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용섭 연세대 교수의 ‘경영형 부농’에 대한 연구가 그 도화선이었다.

1978년 ‘한국사 연구’에 발표된 ‘고부(高阜)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자본전환’이라는 논문을 통해 그는 고부 지역 대지주인 김씨 가문이 자신의 토지를 사용하여 자본가로 변신하는 과정을 하나의 사례로 제시했다. 하나의 예가 있다면 이로 미뤄 여럿의 경우를 상정할 수도 있는 법. 따라서 구한말 당시 지주 중에는 단순한 농사꾼을 벗어나 상당한 토지를 축적하고, 그 토지에서 창출된 농업 이윤을 다시 재생산에 투입하여 확대 재생산을 반복했던 경영형 부농이 여럿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상정한다.

김용섭의 이 연구가 이른바 ‘조선 후기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이름으로 발전했다. 즉 한말에 이미 부르주아 계층(자본가 계층)이 자생적으로 등장하는 등 자본주의의 싹이 텄으므로 만약 일본이 침략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가능했는데, 일본의 침략으로 그 이행이 저지되었다는 것이다.

김용섭의 이론은 오늘날 역사학계가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규범적 틀이 되었다. 그리고 혁명 전략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그의 이론은 식민사관, 다시 말해 일본의 식민지배가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관점을 극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제 민족사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들은 도대체 왜 자본주의 사회 발전에 그토록 목을 매는가? 얼핏 생각하면 자본주의란 사회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어서 자본주의 사회가 없을수록 좋은 것 아닌가?

여기에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 단계 이론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1)원시 공산주의, 2)고대 노예제, 3)중세 봉건제, 4)근세 자본주의, 5)현대 사회주의, 그리고 6)미래의 공산사회로 단계적으로 발전한다. 전 단계가 충분히 성숙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고, 이런 이행은 오직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구한말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다는 것을 좌파가 그토록 열심히 설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마르크시즘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즉 산업 노동자가 주축이 되는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식민지 반봉건사회인 중국에서, 다시 말해 산업 노동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농민들만 많이 있는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해답은 노동자와 농민의 연합이다.

어차피 노동자와 농민 모두 제국주의 수탈의 피해자이므로 두 계급은 함께 연대하여 투쟁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마오쩌둥의 인민해방 전쟁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단독 혁명이 아니라 노동자와 소농민이 연합하고, 여기에 제국주의, 대지주, 자본가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총결집한 통일전선의 혁명이었다.

자본주의 사회 발전에 몰입하는 좌파들

 

마오쩌둥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조선공산당에 영향을 줬고, 북한이 이를 계승했다. 그들 역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관점으로 일제시대를 묘사했다. 노동자·농민·사회주의자들의 연대와 지주·자본가·제국주의 연대가 서로 적대적인 진영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 진영의 계급투쟁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해소되며, 그 결과는 단순한 생존권의 확보가 아닌 계급 해방이라고 했다.

한국의 1980년대 학생운동의 이론도 마오쩌둥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관점을 탈피하지 못했다. 우리의 자생적 자본주의 맹아가 일본에 의해 짓밟히자 그 자리에 ‘매판’적이고 ‘종속’적인 자본주의가 기형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그들의 이론이었다. 1985년에 ‘창작과 비평’ 57호가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을 밝히기 위한 논쟁을 기획한 이래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논쟁에서 좌파 학자들은 한국의 자본주의를 ‘국가 독점 자본주의’, ‘주변부 자본주의’ 혹은 ‘신식민지 국가 독점 자본주의’ 등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매판적 부르주아가 외세의 앞잡이인 국가권력과 결탁해 민중을 수탈하는 이 체제를 뒤엎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토론은 1990년을 지나면서 급격히 동력을 잃었다. 한국 사회의 각종 경제적 지표들이 이들의 주장을 무효화해버렸기 때문이다. 독점을 강화하고 종속을 심화시켜 민중을 수탈하기는 커녕 한국 자본주의는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냈다. 노동자 농민들은 도시 빈민으로 내몰리기는 커녕 ‘마이카’, ‘마이홈’을 누리는 도시의 중산층으로 변모했다. 1970~80년대에 양성된 수백만의 산업 전사 노동자들은 오늘날 억대 보수를 받는 ‘노동 귀족’으로 변신하기까지 했다고 유석춘 교수는 말한다.

한국 자본주의가 짧은 기간 안에 자본을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상대적으로 공평한 분배를 실시했다는 것은 세계은행(World Bank)이 이미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1997년에 한국은 경제 위기를 맞았다. 좌파들은 이 사태에서 쾌재를 불렀다. 한국 자본주의가 몰락해야만 자신들의 논리가 완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마저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1인당 3만 달러에 가까운 소득을 누리고 있다. 민족주의 사관이 상정한 역사는 이처럼 실제 진행되었던 역사에 의해 완전히 적실성을 잃게 되었다. 안병직 교수도 1980년대 자신이 내세웠던 ‘식민지 반 봉건 사회론’을 스스로 폐기하고 대한민국의 경제를 ‘중진 자본주의’로 새롭게 정의하면서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했다.

중국 또한 등소평 이후 개혁·개방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사실상 사회주의체제를 포기했기 때문에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원천적으로 쇠퇴했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말부터 식민지 한국의 경제통계가 정비되면서, 1910~1940년 식민지 한국의 경제성장이 연간 3.6%였으며, 그것은 일본과 동일한 속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제국주의가 주도함으로써 물론 선진국에서의 근대화보다 훨씬 왜곡되고 억압적이기는 했으나, 여하튼 근대화된 자본주의사회가 그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대두된 것이다(이영훈,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제 일본 학자들의 식민사관과는 뉴앙스가 다른 한국적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한 것이다.

종속이론 이어 신자유주의 비판

그러나 종속이론이 몰락한 빈자리에 한국 좌파는 세계화 또는 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 나왔다. 역사 논쟁에서는 친일파 문제가 가장 무서운 무기로 떠올랐다. 자기 진영 고위 공직자의 비리에 대해서는 몇 년 지난 걸 가지고 아직도 문제 삼느냐고 큰 소리 치면서,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다 죽어 없어진 지금 아직까지도 그 후손들에게는 친일의 연좌제를 적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근현대사 역사 해석의 문제는 단순히 학문의 한 분과의 문제가 아니라 이념 전쟁의 무기이다. 이 이념 전쟁에서 패하면 보수 우파는 몰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과연 조선 말기 사회가 자본주의 맹아를 틔울 수 있는 역동적 사회였는가, 그리고 그 지도자들에게는 개혁의 의지와 능력이 있었는가의 문제이다.

우리 측 기록이 미비한 상황에서 우리는 서양인들의 기록에 의거해 구한말 조선의 모습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서양인들 눈에 비친 구한말의 조선은 미신과 질병의 나라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민비였다. 그녀는 임신했을 때 48일간 황소머리와 기타 동물을 희생양으로 바치는 제사를 지냈다. 윤치호는 민비에 대해 “그 영리하고 이기적인 여인이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열심히 섬겼더라면 아마도 왕실이 안전했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청일전쟁 당시 원산에 상륙해 평양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보병 22연대의 하마모토(濱本利三) 소위가 쓴 ‘청일전쟁 종군비록(秘錄)’에 보면, 풍문으로 듣던 것보다 도시가 너무 불결해 놀랐다고 했다. 도로는 쓰레기와 인분으로 넘쳐나고, 악취가 코를 찔러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고 했다.

물질적 인프라는 그렇다 치고 지배 계층의 의식은 어떠했는가? 역시 청일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인 잭 런던에 의하면 “양반들은 모두가 도둑이었다. 백성들은 양반이 으레 자기들 것을 빼앗아가는 사람이려니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을사보호조약 이전까지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활동하던 알렌도 “국민들은 자치 능력이 없으며 더 이상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도 없다”라고 당시의 암담한 조선 상황을 전했다. 해외 외교 사절들이 한국을 불신하는 근원은 다름 아닌 고종의 한심한 통치능력 때문이었다.

조던 주한 영국 총영사에 의하면 “고종은 돈에 관한 한 완전히 무모했다. 자신의 사치와 방종에 충당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관직도 함부로 팔았다. 금광이나 전차 등 열강에게 이권을 줄 때도 자기에게 돌아올 배상금을 중시했다. 일본은 이를 충분히 이용했다 1차 한일의정서 조인 당시에도 고종에게 과거의 모든 특전을 계속 허용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를 안심시켰다. 더 나아가 경부선 이익금 일부와 경의선 이익금까지 보장해 주고, 일본 천황이 선물로 50만 원을 하사할 것이라는 말로 그의 환심을 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조지 케넌은 ‘아웃룩(Outlook)’이라는 잡지(1905년 10월 7일자)에서 “현존하는 조선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그들이 간신히 생계를 위해 벌어들이는 모든 것을 간접 또는 직접으로 수탈하며, 실제로 되돌려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국민의 생명 재산에 대한 아무런 적절한 보호책도 제공하지 않는다.

교육시설도 제공하고 있지 않고, 도로 건설이나 항만 개량도 하지 않는다. 해안에는 등대도 없다. 도로의 청소와 위생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전염병의 예방이나 단속 방안도 취하고 있지 않다. 무역과 산업을 장려하는 노력도 없다. 그저 오로지 가장 저속한 미신을 장려하고 있을 뿐이다” 라고 썼다. 도저히 나라라고 할 수 없는, 망하기 직전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좌파들은 반일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부패하고 전근대적이었던 조선을 미화하기에 바쁘다. 꼬박꼬박 ‘고종황제’ 혹은 ‘명성황후’라는 명칭을 쓰면서, 안중근 의거를 고종이 배후에서 도왔다느니, 안중근의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고종이 거액을 냈다느니, 민비는 일본에 의해 희생된 ‘조선의 국모’라느니 하는 말들로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일본 조상들은 메이지유신 때부터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최대한 애를 썼고 우리 조상들은 쇄국정책으로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뒤졌고, 그것이 식민 침탈을 초래한 것이다. 이것이 진실일 뿐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식민지 시기에 한국인들은 신분제가 폐기됐고, 근대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임금과 소득이 높아졌고, 상업 거래가 활발해졌다. 상업의 발달은 당연히 도시의 발달을 재촉해 서울, 부산 등의 대도시와 군산, 원산 등 항구 도시가 발달했다.

시간 사용의 합리화 및 생활습관의 개선도 실현되었다. 음력 대신 양력을 따를 것, 집무·집회·방문 그리고 학교의 등하교 시간을 철저히 지킬 것,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시간표에 맞춰 생활할 것 등이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더 부지런해졌고, 신용의 개념도 생겨났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가해진 새로운 규율은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신문화에 점차 내면화되어 갔다. 비록 일본이 식민지 경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펼친 정책이었다 해도 영민한 한국인들은 이것을 기회 삼아 근대적 의식을 싹 틔운 것이다.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인데, 좌파는 이 부분에서 경련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은 발설하기만 하면 집단 린치를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친일을 문제 삼기 전에 조선말의 학정과 수탈 그리고 지도자의 무능을 생각해야 하고, 과거보다 나아진 생활 조건 속에서 일제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더군다나 식민지 경험을 근대화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은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일 뿐, 결코 모욕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반미, 반(反) 국제주의, 자주국방 등을 표방하는 우리 시대 좌파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구한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부르짖던 수구파를 연상시킨다. 한없이 퇴행적이며 폐쇄적인 한국 좌파의 뿌리가 구한말에 있다는 강규형 교수의 말은 그런 면에서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현재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폐쇄적 민족주의와 수구의 이념이 승리하는 곳은 없다. 베네수엘라는 온 국민이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폭동을 일삼는 나라가 되었고, 그리스는 온 국민이 공무원을 먹여 살리느라 허덕이는 파산 직전의 나라가 되었다.

반대로 우파의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념은 당당하게 세계사적 흐름을 타고 있다.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사회당은 처절하게 몰락한 반면, 신당을 창당해 노동시장 유연화와 법인세 인하(33%에서 25%로)를 약속했던 마크롱 대통령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우리만 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철 지난 이념에 목을 매고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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