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를 잠들게 하라
케네디를 잠들게 하라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11.18 11:0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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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22일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달라스에서 피살됐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기자 레스턴은 이렇게 썼다. “달라스에서 미국이 잃은 것은 케네디 하나가 아니다. 미국은 젊음과 희망을 잃었다.”

2013년은 케네디 대통령 사망 50주년이 되는 해다. 미 민주당은 벌써부터 케네디 마케팅에 들어갔다. 내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오바마에 대해 ‘블랙 케네디’라는 이미지를 선전하고 있다.

미국인들에게 존 F. 케네디(JFK)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 불리는 그의 추모탑 불길 그 자체다. 미국은 46세에 유명을 달리한 케네디를 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결단력을 보였고 소련의 핵전략을 수정시켰으며 흑인 민권을 신장시켰다.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보라”고 했던 케네디이기에 그는 미 민주당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미국 시민들 사이에서도 영웅이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진보진영에서 케네디는 ‘민권 대통령’이고, 보수진영에서 케네디는 공산주의에 대항한 ‘자유의 수호자’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가 과대 포장된 ‘신화’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진실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케네디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를 경계하며 완곡하게 주장한다. “내 견해로는 케네디는 좋은 대통령이긴 하지만 위대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그를 좋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정책 결정에서의 신중함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과장된 신화는 먼저 ‘쿠바 미사일 위기’가 누구의 잘못으로 시작됐는지 묻는 질문에서 드러난다. 위기의 주범은 다름 아닌 케네디의 비현실적인 이상주의 외교안보 정책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케네디는 세계 핵전쟁을 막으려면 유연한 외교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NATO와 군사적 동맹을 통한 유럽의 각국별 핵억제와 재래식 군비증강을 주장했다.

케네디의 제안에 서유럽국가들은 혼란에 빠졌다.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나라는 독일이었다. 독일은 어떻든간에 NATO의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자 핵으로 소련의 도시들을 인질로 잡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역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소련의 지령을 받은 동독이 먼저 선수를 쳤다. 바로 1961년에 발발한 베를린 위기였다.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자 케네디는 당황했다. 케네디의 반응은 “매우 보기 좋지 않은 선택이지만 전쟁보다 천 배는 낫다”였다. 결국 프랑스 드골의 반발을 샀다. 프랑스는 66년 NATO를 탈퇴하고 독자 핵무장에 나섰다.

소련에 조롱당한 케네디

케네디는 남미국가들과는 ‘진보동맹’을 맺고 경제지원을 했지만 남미의 사회주의 세력을 막지 못했다. 문제는 쿠바였다. 카스트로가 쿠데타에 성공하자 1961년 4월 케네디는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미국이 훈련한 1400명의 쿠바 망명자들을 동원해 쿠바 남부를 공격했다. 하지만 쿠바군에 의해 패배했다. 저 유명한 피그스만 사태다.

이후 여러 차례 케네디는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체면을 구긴 케네디는 오스트리아로 날아가 소련의 흐루시초프를 만나 담판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흐루시초프로부터 애송이 취급을 당했다. 케네디는 흐루시초프로부터 ‘피그미’라는 조롱마저 당했다. 흐루시초프는 이미 케네디의 전쟁 회피 속마음을 들여다 봤다. 이듬해인 1962년 미국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왔다. 소련이 미국의 코앞에 핵탄도 미사일을 배치할 결심을 한 것이다.

 

국내적으로도 케네디 대통령의 업적은 부진했다. 그의 입법안은 종종 의회에서 부결됐으며 심지어 민주당내에서도 반대로 부결되곤 했다. 케네디는 그런 문제를 흑인민권 운동으로 돌파하려 했다. 사실 케네디는 흑인민권 운동을 내켜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케네디 대통령은 처음 남부 지역의 백인들에게 민권운동을 지지하라는 말을 드러내놓고 하지 않았다. 다른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 남부의 동의가 필요했던 케네디로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1962년 흑인 대학생 제임스 메레디스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시시피 대학교에서 입학을 거부당하자 케네디는 법의 공정한 집행을 위해 연방 군대를 파견했다. 앨라배마의 버밍엄에서 발생한 흑백분리시설 철폐 시위에 경찰이 폭력적인 진압으로 나서자 케네디는 공공장소에서 흑백의 차별을 없애는 새로운 민권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의회를 움직이지는 못했다.

케네디는 그러한 자신의 정치적 액션을 홍보하기 위해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등 이미지 메이킹에 온 힘을 기울였다. 흑인 민권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케네디가 의회를 적극 설득했다는 주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흑인 민권법안은 케네디 사망 후 린드 존슨 정부에서 통과됐다. 린드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의 죽음을 능숙하게 이용해 의회를 압박했던 것이다.

지나친 과대평가

케네디는 교육정책에서도 진보이념에 입각해 공교육에 재정을 투입하려 했지만 보수적인 남부 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남부 보수주의자들은 교육에 연방정부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교육은 자치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유였다.

경제정책 역시 철강산업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문제로 산업계와 갈등을 겪었으며 그나마 조세감면 정책으로 경제 회생의 물꼬를 튼 것은 업적이었다. 그렇다면 케네디는 왜 그렇게 미국인들로부터 신화적인 대통령이 됐던 것일까.

사실 케네디 대통령은 재임 시절보다 서거한 후 더 많은 후광을 얻었다.

미국의 진보세력은 케네디를 이용해 미 보수주의 정치세력을 공격했다. 이 문제를 가장 분명하게 파해친 사람은 후버연구소의 제임스 피어슨(James Piereson)이었다. 그가 2007년 펴낸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기념비적인 분석서 <카멜롯과 문화혁명>에는 ‘케네디의 암살은 어떻게 미국의 진보이념을 타락시켰나’라는 부제가 달렸다.

피어슨은 케네디의 죽음을 미국의 젊음과 희망의 죽음에 비유했던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레스턴의 다른 기사를 인용한다. 케네디 대통령이 서거한 3시간 뒤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레스턴의 부고기사였다. 진보적 이념을 가진 레스터는 “케네디는 극우의 폭력행위를 막으려 했다”고 썼다.

이 기사는 즉각 케네디 암살에 미 보수와 극우세력이 개입돼 있다는 루머를 만들어 냈다. 케네디의 죽음은 카스트로를 지지한 공산주의자 오스왈드였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군산복합체의 음모라거나 CIA의 음모라거나 심지어는 미 보수 극우세력의 소행이라는 루머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종종 그러한 루머에 기반한 민주당의 정치공세가 미 공화당과 보수진영에 가해졌다. 동시에 모든 민주당 대통령들은 케네디와 자신의 공통점을 만들려 노력했다.

내셔널리뷰의 온라인 편집장 조나 골드버그는 그러한 민주당의 케네디 우상화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시행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미 ABC의 토리 모란은 오바마에 대해 ‘카멜롯의 새로운 아들’이라고 코멘트 했다. 카멜롯은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왕국이다.

 

케네디의 기사도 정신을 칭송하던 이 호칭이 이제 오바마 대통령에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존 에프 케네디의 동생 테드 케네디와 유족인 딸 캐롤린 케네디는 오바마에게 케네디를 기념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성화를 전달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CBS의 크리스 매튜는 케네디의 정신을 가리켜 ‘민주주의는 시민의 종교’라고 말했다. 사실 이러한 표현이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미국의 전통적인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갖는 케네디에 대한 시각은 싸늘하다.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의 기독교 정신을 후퇴시켰다는 판단에서 그렇다. 그 사건은 케네디 취임 1년 후인 1962년 뉴욕에서 일어났다.

1960년대까지 미국 전역의 각 학교 조회시간에는 특정한 의식이 행해졌다. 즉 주기도문을 포함한 기도나 성경 구절을 읽는 의식 등이었는데 그 내용은 주에 따라 학교에 따라 다양했다. 이런 상황에서 뉴욕 주 공립학교에서도 학생 전체가 기도를 했다. 이에 대해 학부모 중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결국 한 학부모 단체가 법정에 서게 된다.

‘엥겔 대 비탈레 사건’으로 불리는 이 재판에서 미국 대법원은 억지로 기도하도록 강요받은 학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부모 편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이 난 후 대법원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일어났다. ‘법원이 신을 무효화했다’는 언론의 헤드라인에 이어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 더 이상 호소할 수 없는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판결에 대한 지지를 촉구하면서 기자회견을 했다. 대통령의 이러한 입장 표명은 뉴욕 주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 파급 효과를 일으켜 각 주의 학교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사라지는 결과를 촉진했다.

이 문제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 판결 이전에는 매일 아침 미국 전 지역의 학교는 전교생들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는 토마스 제퍼슨 등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학교에서 종교를 필수적으로 가르칠 것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런 미국인들이 꿈꾼 나라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었다.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기독교 정신’이 미국인들의 정신적 뿌리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습은 흔히 ‘미국적 예외’(America exceptionaism)라고 불렸다. 그것을 부정한 최초의 대통령이 바로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 케네디였던 것. 그래서 이 사건은 미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케네디가의 저주 배경으로 종종 언급된다.

케네디家의 비극

엥겔 대 비탈레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난 다음 해인 1963년 8월 케네디는 막내아들을 백악관에서 낳았으나 이틀 만에 죽는 슬픔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해 11월 댈러스에서 케네디 자신이 암살당한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도전했던 남동생 로버트 케네디 역시 1968년 선거 활동 중 저격당해 죽고 만다.

1984년에는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 데이빗이 마약 과용으로 죽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대를 이은 케네디 가의 비극이 이어진다. 1997년 로버트 케네디의 또 다른 아들 마이클이 스키 사고로 사망하더니 1999년에는 마침내 미국을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의 유일한 아들 존 F 케네디 2세가 부인과 함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 때 싸늘한 시체가 돼 백악관을 떠나는 아버지를 향해 경례를 하던 그 꼬마 아이가 죽음으로써 존 F 케네디는 대가 끊기는 비극을 맞게 된다. 그리고 작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며느리이자 조지프 케네디의 손자며느리인 메리가 자살했다.

존 F. 케네디는 분명히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보여준 용기와 신념은 초기 미국의 유약한 외교안보 정책을 포기하고 강력한 힘의 질서를 추구함에 따라 ‘냉전’이라는 세력균형을 가져왔다. 긴장이 평화를 가능케 한 것이다. 아울러 케네디 대통령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렇기에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혁명을 용인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치적에 조급했다. 한국의 국내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박정희 군사정권의 조속한 민정이양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혁명세력과 마찰을 겪었다. 그후 케네디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플랜을 경원시했고 협조를 거부했다. 박정희는 이때부터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네디는 제철소를 지을 수 있도록 차관을 요청하는 박정희의 요구를 비경제적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하지만 결국 역사는 박정희의 선택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했다. 박정희 정권의 수출대박이 바로 철강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영원한 불꽃 존 F. 케네디는 이제 잠들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요청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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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4-09-12 19:17:3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ㅇ 2014-09-12 19:17:29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필라델피안 2014-06-06 01:25:11
그와 더불어 박정희도 이제 잠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의 요청입니다.

이민복 2013-11-25 13:09:57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