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사태와 다시보는 역대 게이트
저축은행 사태와 다시보는 역대 게이트
  • 미래한국
  • 승인 2011.06.2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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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불법대출 아닌, 10여 년 전 ‘게이트’들과 유사

부산저축은행과 삼화저축은행 사태를 보면 단순한 불법대출이라기 보다는 10여 년 전 ‘게이트’들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때문에 지금 영업정지된 저축은행 문제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게이트’의 출발 ‘정현준 게이트’

외환위기를 극복하리라는 기대를 업고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벤처기업들을 키웠다. 정부가 ‘묻지마 투자’를 선도하자 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벤처’니 ‘IT’라는 말만 붙으면 수십 배 투자가 일상이었다. 돈이 흘러넘치던 강남 테헤란 밸리는 룸살롱을 중심으로 불야성을 이뤘다.

당시 상호신용금고들도 이런 ‘묻지마 잔치’에 끼어들었다. 일부 상호신용금고는 사채업자들을 끌어 들였다. 이들이 벤처와 함께 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정현준 게이트’다. 김대중 정부와 벤처업체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정현준 게이트’가 터진 것은 2000년 3월부터다.

부산 출신인 정현준 씨(한국디지털라인.이하 KDL)는 벤처업계에서는 M&A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정 씨는 한 유명 M&A부티크에 입사해 인수합병 기법을 배웠다.

정 씨는 이후 ‘비정상적인 M&A’를 통해 동방상호신용금고와 디지털임팩트 등 20여개 회사의 대주주가 되면서 ‘벤처업계의 황제’처럼 굴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헌재 금감원장 다음으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1999년 7월 업계에서는 “정현준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돌았다.사실 정 씨는 1999년 KDL의 주가 시세 조종을 한 혐의로 금감원과 검찰에서 이미 조사를 받은 상태였다.

상황이 다급해졌다고 느낀 정 씨는 본사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에 비밀 사무실을 만든 뒤 사업 확장에 나섰다. 사업 확장을 통해 ‘담보’를 늘려 유동성을 확보할 심산이었다. 담보가 늘어나면 관계사인 동방상호신용금고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대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 씨는 이를 위해 KDL과 디지털 임팩트, 평창정보통신 등을 한데 묶어 ‘디지털홀딩스’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평창정보통신 지분을 공개 매수했다.

하지만 그에게 공개매수는 ‘고난도’였다. 결국 정 씨를 믿었던 개인 투자자들은 400억 원이 넘는 손실을 입었다. 당시 이 정보를 입수한 언론인들도 평창정보통신과 KDL 주식에 투자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 씨의 계획이 틀어지면서 KDL의 자금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그러면서 동방상호신용금고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던 이경자 부회장과의 사이도 틀어졌다. 2000년 들어서면서부터 코스닥이 점차 활기를 잃기 시작하자 정 씨는 신용금고 운영에 서서히 개입하기 시작했다.

정 씨는 자신이 대주주인 동방상호신용금고로부터 500억 원을 불법대출 받으면서도 30%의 이자를 물었는데 이경자 부회장은 같은 불법대출을 받은 후 이자를 불과 19% 밖에 내지 않았음을 알고 크게 다퉜다고 한다. 이때부터 틀어진 두 사람은 서로 감정 대립으로 치달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경자 부회장이 정 씨에게 해준 불법대출액을 회수하면서 대전 그린필백화점과 KDL은 부도가 나고 정 씨는 금감원에 의해 고발당하게 된다. 검찰에 구속된 정 씨는 이경자 부회장의 범행도 자백해 그 또한 구속된다. 동방상호신용금고는 결국 문을 닫는다.

검찰이 이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장 모 당시 금감원 국장이 동방상호신용금고의 불법대출을 적발한 금감원 내부 조사를 무마하는 데 앞장선 것으로 밝혀졌다. 장 국장은 이후 잠적했다 23일 뒤 자살한 채 발견됐다. 장 국장 외에도 정치인, 국정원 간부, 아태평화재단 관계자,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들이 연루된 것도 드러났다.

이경자 동방상호신용금고 부회장(좌)과 정현준 한국디지털라인 사장(우)

무늬만 ‘투자은행가’인 진승현의 게이트

뒤이어 터진 것이 진승현 게이트다. 정현준 씨 만큼이나 유명했던 진승현 씨는 업계에서는 ‘월스트리트에서 투자은행기법을 배운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에서 ‘인턴’ 수준으로 일을 배운 게 드러났다.

진씨는 3년 동안 미국, 홍콩 등을 돌았다. 1997년 말 귀국한 뒤 신세기통신, LG정보통신, 한글과컴퓨터 등에 투자해 20억 원을, 고려산업개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주당 100원에 인수한 뒤 1,200원에 되팔아 80억 원을 벌었다.

진 씨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1998년 현대창업투자를 인수했고, 1999년 2월에는 에이스캐피탈(MCI코리아의 전신)이라는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한 뒤 1999년 8월 열린상호신용금고와 MCI개발을 인수했다.

진 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대유리젠트증권과 함께 영 리젠트퍼시픽그룹을 끌어들여 리젠트증권, 리젠트종금, 리젠트자산운용, 리젠트화재 등을 산하에 둔 코리아온라인(KOL)이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진 씨는 ‘투자금융의 귀재’처럼 보인다. 그 ‘후광’ 덕에 당시 인기 연예인과 연인 관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검찰 수사에서 진 씨는 1999년부터 2001년 사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열린상호신용금고와 한스종금, 리젠트종금 등에서 2,300억 원을 불법대출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리젠트증권 주가를 조작해 100억 원 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뒤 권노갑 전 의원, 김방림 전 의원(한국여성정치연맹 총재), 여당 간부인 최택곤 씨,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 정성홍 전 국정원 경제단 과장,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과 아태재단 관계자들에게 로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때 김영재 전 금감원 부원장보도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무죄로 풀려났다.

뿐만이 아니라 국정원이 ‘진승현 게이트’와 관련된 내용을 도청해 그 내막을 알고 있었음이 폭로되기도 했다. 로비 자금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에게 건네졌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검찰은 결국 비자금 100억 원의 용처와 행방을 밝혀내지 못했다. 국회는 이 사건 후 국정감사를 벌여 ‘금감원이 당시 불법 행위를 여러 차례 확인하고도 검사하지 않았다’고 질타하기도 했지만 결국 유야무야됐다.

 

김대중 정부 게이트의 클라이막스 ‘이용호 게이트’

2002년 1월 G&G그룹 이용호 회장이 주가조작과 불법대출, 비자금 조성 및 로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다. 이 사건에는 상장사 11개사, 코스닥 2개사 등 모두 30개 기업, 경기상호신용금고, 신흥상호신용금고, 대양상호신용금고 등이 연루됐다.

전남 앞바다의 ‘보물 사기 사건’도 이 사건에 포함돼 있다. 이용호 G&G그룹 회장은 나중에 터진 ‘론스타 헐값매각 의혹’의 주인공 김재록 인베스투스 투자자문 회장과 같은 전남 영광 출신으로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씨는 어릴 적 가정 형편이 어려워 광주상고로 진학했고 졸업 후 버스회사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밝힌다.

이랬던 이 씨는 1990년대 후반 19개 상장사를 거느린 지주회사 회장으로 등장했다. 이 씨는 “1990년 부동산 시행사업을 하다 시공업체들이 부도난 뒤 김영삼 정부로부터 1,200억 원의 정책자금을 받아 이들을 구조 조정하는 작업을 했고 큰돈을 벌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중에 붙잡힌 이용호 게이트의 몸통 최병호 씨는 다른 이야기를 털어놨다. 1980년대 말 명동 사채시장에서 활동한 최 씨는 친인척과 함께 경인상호신용금고 대주주로 명동 사채 시장에서 이름을 날렸다. 최 씨는 1998년 G&G그룹 이 씨를 만나 그가 하는 주가 조작, 유상 증자, 전환사채 발행에 뒷돈을 댔다고 한다.

최 씨는 1999년 8월 KEP 전자의 1,700만 달러어치 해외 전환사채 발행, 400억 원대 유상 증자를 통한 주가 조작 등에 돈을 댔다. 그는 속칭 ‘이용호 펀드’를 관리하면서 가·차명 계좌 27개를 통해 대우금속 주가 조작도 도왔다. 당시 최 씨는 서울 강남에서 체이스벤처캐피탈과 체이스벤처투자자문사를 운영하며 구조조정 전문가를 자처했다.

2001년 7월 주가조작을 한 사실이 들통 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난 최 씨는 다시 이 씨와 손잡고 G&G그룹의 계열사인 (주)레이디의 유상증자에 참여, 880만주를 배정받았다. 최 씨는 또한 김영준 대양상호신용금고 회장과 신용금고 자금으로 G&G그룹 계열사인 인터피온 주가 조작과 삼애인더스 보물섬 주가 조작 등에 뒷돈을 댔다.

2001년 이용호 게이트가 터지자 최 씨는 해외로 출국했다. 대신 광주PJ파 출신으로 알려진 사업가 여운환 씨가 배후로 지목됐다.

사채업계에서는 ‘이용호 씨가 최 씨의 자금을 끌어다 쓰다 여운환 씨로 자금줄을 바꿔서 폭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최 씨는 인도네시아에 숨어 있다 현지 경찰과 우리나라 경찰의 공조수사로 추방돼 체포됐다. 

이 사건은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벤처 게이트’로 검찰이 1800여 명에 달하는 로비 목록을 찾아내는 등 그 규모면에서는 역대 최대 수준으로 알려졌다. 이때 한나라당은 ‘이용호 게이트의 몸통은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과 아태재단’이라고 지적했다.

 

저축은행, 대주주의 사금고 아닌 ‘권력의 사금고’인가

결국 정부는 특별검사팀(팀장 차정일)을 꾸려 수사를 하게 된다. 특검 수사 당시 특이한 점은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된 자들이 이전의 ‘정현준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된 자들과 상당 부분 겹친다는 점이었다. 특검은 나중에 이수동 아태재단 상임이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사장, 김형윤 전 국정원 경제단장 등을 구속했다. 

저축은행이 전면에 나선 ‘게이트’는 대부분 김대중 정부의 ‘게이트’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저축은행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정치권과 금융권에서는 이런 이유에 대해 ‘권력, 금융당국과의 유착설’을 제기한다.

실제로 상호신용금고가 저축은행으로 바뀔 때쯤 드러난 정현준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에는 아태재단 상임이사와 사무처장, 행정실장,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남 차 모 씨와 아들들, 국정원 차장, 국정원 고위간부, 지역 언론사 회장, 검찰총장, 검찰 지청장, 조폭 등이 망라돼 있다. 그리고 모든 ‘게이트’에는 저축은행들의 불법대출이 끼어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는 금융감독 관계자들이 저축은행으로부터 로비를 받다 기소된 사례가 크게 증가했다. 2006년에는 금감원 수석검사역이던 양 모 씨는 H상호저축은행의 불법 대출에 개입한 게 발견돼 검찰에 기소됐다. 2007년에는 김중회 금감원 부원장이 S저축은행 인수 과정에 개입해 수억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긴급 체포되기도 했다.

이처럼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급속히 성장한 신용금고(저축은행) 비리가 한 번에 터진 것이 이번 부산저축은행, 보해저축은행, 삼화저축은행 사건이다. 이 중 부산저축은행에는 광주일고 동문과 ‘민주화 인사’ 등은 물론 기업사냥꾼의 먹이가 된 코스닥 기업도 끼어든, 캄보디아와 인천효성지구가 회자된다.

여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의 측근이 등장한다. 이처럼 상호신용금고에서부터 저축은행까지의 변천사는 ‘권력형 비리’의 변천사다.

또 다른 ‘권력’이 개입됐다는 정황도 있다. 지난 8일 광주지검은 “안진회계법인 광주사무소가 보해저축은행의 BIS 비율을 1%에서 8%로 조작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저축은행 부실 및 유상증자를 빙자한 사기 등에서 대형 법무법인과 회계법인이 개입된 정황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저축은행 비리는 ‘현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금융질서 문란행위’와 그 궤를 함께 한다. 이런 시각에서 살피지 않을 경우 저축은행 비리의 몸통을 놓칠 가능성이 높다. (미래한국) 

전경웅 객원기자 enoch205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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